[LAYER 1 ]김병호류 가야금산조 심새미 가야금 독주회 (2013.12.04 국립국악원 우면당)

김병호류 가야금산조 심새미 가야금 독주회 (2013.12.04 / 국립국악원 우면당)

김병호류 가야금 산조

산조의 효시 김창조(金昌祖, 1856-1919)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는데, 10년 동안 원형을 전수 받은 안기옥이 그렇고 죽파에게 산조를 가르친 한성기 역시 김창조의 제자이다. 아울러 강태홍과 김병호(1910-1968) 역시 김창조의 가락을 물려받은 이들이다. 이들은 모두 스승의 가락에 자신의 가락을 더해 자신들의 가야금산조를 창시했고 그 후대들이 지금까지 각 가문(유파)을 이루어 산조를 세상에 알리고 있다. 김병호류 가야금산조는 그의 성격답게 선율이 섬세하고 변화가 다양하며 엇모리와 단모리가 추가되어 장단의 독특한 맛이 있다. 이보형(한국고음반연구회장)의 글에 의하면, '김병호의 가야금산조는 단단하게 뭉친 옥석과 같은 음악이다. 그냥 보면 그 진가를 알기 어렵다. 다만 갈고 갈아야 그 본연의 빛을 볼 수 있다. 겉으로 과장된 표현이 절제된 대신에 판소리에 흔히 구사되는 복잡한 음형으로 되어 어려운 연주 법이 구사되고 복잡한 음악구성과 심오한 내면적인 감정이 얽혀있어 본연의 진가를 들어내기가 쉽지 않은 산조이다라고 금암회의 실황앨범의 추천사에서 적고 있다. 이렇듯 김병호류 가야금산조는 조신한 맛과 더불어 강하게 몰아치는 맛이 공존한 다. 김병호는 1910년 11월 5일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에서 김기봉과 박연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한학을 배우던 1915년 무렵, 같은 고향사람인 김창조의 문하에서 가야금산조를 배웠다. 선천적인 음악적 재능은 가야금은 물론 거문고, 해금, 대금 등에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였다고 한다. 김병호는 스승 김창조와 고향(전남영암)이 같아 음악의 인연을 맺을 수 있었으며 가야금산조는 물론 판소리, 가야금병창에도 능했다고 한다. 그는 1952년경 부산 동래권번의 가야금교사로 재직하였고, 이 당시 김병호는 강문득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강문득에게 자신의 산조 가락을 전수하였다고 한다. 김병호에게 가야금을 전수 받은 강문득의 회고에 따르면 "한가락을 가르친 다음 기억을 해내지 못하면 어머니에게 전언하여 늘 물벼락을 맞게할 정도로 호되게 가르치셨다 "고 한다. 1961년 이후 국립국악원, 서울대학교, 국악사 양성소등에서 연주 및 후진 양성에 전력하였으나 1968년 췌장암으로 58세의 길지 않은 생애를 마쳤다.


삶과 음악의 균형 그리고 삶을 통해 음악을 말하는 나. 

산조를 일컬어 귀신 붙은 음악이라고 한다. 산조를 연주하면 할수록 더욱 빠져들어 죽을 때까지 만족을 하지 못해서라는데, 산조라는 음악이 매번 할 때마다 틀리고, 한해 두해가 틀리니 음악에 삶의 연륜이 더해지면서 계속 진화하기 때문에가 아닐까.

처음에 산조 공부를 시작한 이유는 내 음악의 정체성을 찾기 위함이었다. 산조는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음악이 아니기에 여유를 가지고 하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것이 벌써 7년 전의 일이다. 처음 독주회를 준비했던 그 시절과 너무 다른 상황 속에서 다른 마음을 가진 채 지난 순간들을 돌이켜보면 그때가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삶의 무게가 훨씬 더 크게 느껴지는 지금, 예전처럼 자유롭게 연습에 전념할 시간은 분명히 부족하다. 하지만 이러한 과도기야말로 삶의 경험이 자연스럽게 음악 속에 녹아들기 시작하는 순간이자, 삶의 리듬 자체를 산조의 흐름과 조화시키는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시작이라는 생각에 차분한 마음으로 삶과 음악의 균형을 조금은 다른 시선을 바라보기로 한다. 이번에 연주하는 김병호류 가야금 산조는 김병호-양연섭의 가야금 산조와 달리 김병호-강문득 선영숙을 거쳐 이어진 산조이다. 평소에 음악과 배움에 관해서 항상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개방적인 태도이다. 음악과 배움을 대하는 자세는 항상 열려있어야 하고, 절대적인 것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성을 존중하고 유연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뭔가 다른 존재에 대해서 거부감보다는 호기심을 먼저 갖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울 지역에서 널리 연주 되는 김병호류가 아닌 다른 김병호류 산조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이러한 '뭔가 다른' 김병호류 산조를 공부해보고 싶다는 순수한 호기심으로 선영숙 선생님을 찾아가게 되었다.

김병호-강문득-선영숙을 통해 이어진 김병호류 산조는 가락적인 면에서 크게 다른 점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느낌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그 이유는 시김새나 표현의 방법, 조를 운용하는 방식에서 상이한 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강문득의 독자적인 가락으로 중중모리 앞부분에 10장단과 단모리 마지막 부분 15장단이 첨가되었고, 진양 앞부분에서는 계면 성이 많이 느껴진다는 점이 예전에 배웠던 김병호류 산조와 또 다른 차이점이다. 독주회 준비는 단 한 번도 수월했던 적이 없었다. 단순히 체력적인 어려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장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몸으로 체득한 것이 학교의 교육을 통해 음악을 배운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내재된 한계, 각 유파가 갖고 있는 고유의 어법과 표현의 재현, 음악의 내면과 이면을 이해하고 소화하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들이 항상 나를 괴롭힌다. 그래서 독주회 준비는 지금까지 학교에서 음악을 배운 나' 의 육체적, 정신적 껍질을 하나씩 떼어 내서 삶을 통해 음악을 말하는 나' 로 거듭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치 수집하듯이 여러 유파를 거치는 것이 과연 어떠한 의미가 있는 지에 대해서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직접 그러한 과정을 거치고 있는 내 자신도 스스로의 모습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낼 때도 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내가 확신하는 것 은 이러한 과정 그 자체가 내가 음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삶의 모습이자, 이후 또 다른 음악을 공부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은 비록 정형화 되어버린 산조라는 음악의 본질을 탐구하면서 자유롭게 열린 또 다른 음악의 세계를 향한 발걸음을 묵묵히 옮길 것이다.

심 새 미


<가락따라 소리따라(5)>

김병호류 가야금 산조 강문득 한을 풀어내듯 깊고 애절한 선율

경향신문 1994.02.04 (기획/연재)


우리의 바다는 삶의 뿌리를 내리려는 인간에 저항하는 생존의 바다였다. 그러나 넘실대는 허무주의가 애끓는 물결로 다가올 때 바다는 이미 「푸르른 생존」의 의미를 떠난다. 그것은 가야금 12줄에 튕기는 맑고 투명한 한의 승화로 이어진다.

부친 독려로 시작 강문득(49)은 별난 국악인이다. 경기중학교를 다니다 그만두고 국립국악원 국악사양성소에 다시 입학한 경력이 재미있다. 평소 낙천적인 성격에 다정다감하지만 국악콩쿠르를 앞두고는 다른 사람이 돼버린다. 제자들을 닦달하며 재떨이를 던지는 장이기질도 그답지 않다. 92년 4월 부산에서 열린 제3회 개인연주회에는 정원 4백 명의 3배인 1천2백여 명이 몰리는 바람에 공연장 출입문의 유리창이 깨지는 등 국악공연사의 이변을 낳기도 했다. 자신이 가르친 성애순(전남대교수), 김남순(부산대교수), 서원숙(단국대교수)씨 등 교수제자들이 수두룩하지만 정작 자신은 38세에 대학을 들어간 만학도인 점도 독특하다. 강문득은 5살 때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야금이란 운명의 끈에 그가 접선된 것은 4살 때였다. 누가 알았을까. 4살배기 천사가 관절염으로 애끓는 삶의 문을 열게 될 줄을. 왼쪽 대퇴부에 염증이 퍼지기 시작했고 부모들은 울며 보채는 아기를 안고 한약방과 침집에서 살다 시피 했다. 차도가 있을 무렵이었다. 하필 6.25 전쟁이 터졌다. 의사치료는 커녕 페니실린을 구하기도 수월치 않았다. 그의 운명은 「다리를 사용하지 말고 앉아서 가야금을 뜯으라는 주문에 걸려든 것이다. "정말 운명이에요. 가야 금을 걸쳐야 하는 오른쪽 다리는 멀쩡했거든요." 낙천적인 그의 어투는 단순한 명랑함이 아니다. 남들처럼 뛰놀고 싶고 천진난만해야 할 어린 시절의 공백이 가져다준 달관의 색채가 배어있다. 그는 1945년 강장원 씨(62년 작고)와 임유앵 씨(64년 작고)의 2남중 차남 으로 서울 원서동에서 태어났다. 강장원씨는 판소리 명창으로 국립국악원에서 후학을 지도했고 임유앵씨도 판소리 명창이었다. 특히 임유앵 씨의 여동생은 국극의 여왕 임춘앵 씨였고 막내여동생의 아들들은 진경 국악단을 이끈 김진진• 김경수형제. 천재소리를 들어가며 경기중학교를 다니다 국악사양상소로 옮긴 이유도 부모의 권유 때문 이다. 강문득은 5세붙 임유앵씨가 소속된 국극단 악사인 김병호씨를 독선생으로 가야금을 배웠다. 배움은 김씨가 작고할 때까지 18년 간 계속됐다. 그 당시 충청도 만석꾼의 후손이었던 강장원씨는 국악인들의 든든한 후견인이었다. 우리가 알만한 국악인들의 대부분이 강장원씨의 재정적 도움을 받았고 오갈데 없는 국악인들은 그의 집에서 기거했다. 또 아들의 불편한 몸을 생각한 그는 집 동네인 원서동에 김병호씨의 주택을 구입해줄 만큼 아들을 위해 힘을 쏟았다. 김병호 선생의 가야금지도는 혹독하기로 유명하다. 선생의 지도는 하루에 1시간이지만 연습은 매일 7시간씩이었다. 중학교 때 부터 10년간 줄곧 그랬다. 선생은 연습방에 마이크를 설치하고 마이크 줄을 자신의 방에 있는 스피커와 연결해 시도 때도 없이 연습여부를 점검했다.

집념의 채보작업 말이 7시간이지 미쳐버릴 것 같았어요. 겨울이었어요. 하루는 잠깐 연습을 멈췄는데 하필 그때 선생님께서 스피커를 트셨어요. 난리가 났죠. 선생님께 찬물세례를 받고 팬티바람으로 오들오들 떨면서 가야금을 탔죠." 연습도중 가야금줄이 튕겨나가며 얼굴에 피가 날 만큼 살이 찢어져도 가야금을 계속 타야했다. 그는 친구도 없었다. 놀고 싶었지만 7시간의 연습이 끝나면 지쳐 잠들기에 바빴다. 가야금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가야금에 욕심을 내다보니 다른 선생의 가야금산조도 배우고 싶었다. 여성적인 김병호류와 대조되는 강태홍류가 탐났던 것이다. "김병호류는 심도깊은 농현으로 깊고도 애조띤 가락과 섬세한 음색이 특징인데 남성적이고 호쾌한 류를 배우고 싶었죠." 1965년부터 1969년까지 (고)원옥화씨에게 강태홍류를 사사, 4년간은 두 선생을 섬겼다. 그러나 김병호선생의 예리한 눈길을 속일 순 없었다. 강태홍류를 배운다는 사실을 알게 된 김선생은 노발대발이었다. 인연을 끊자며 강문득의 김병호류 산조후계자 인정을 거부했다. 김병호류 가야금 산조는 깊은 농현 때문에 율폭이 깊고 넓어서 주법을 익히는데 남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강문득의 가야금생활 45년 가운데 김병호씨를 사사한 18년간은 긴장의 나날이었다. 그가 공부할 당시는 김병호의 가락들이 채보되지 않은 상태여서 오로지 구음에 의존해 주법을 익히고 외워야 했다. "자연 악보 상에서 표현 될 수 없는 절묘한 기법과 변화무쌍한 장단과 붙임새등 실제 연주와 구음을 통해서 배우고 익힐 수 있음은 천혜였죠." 어렵게 배운 만큼 선생의 업적을 갈무리하는 작업도 그의 몫, 김병호류 산조의 채보작업을 완성했고 지난해 11월 「김병호류 가야금산조 보존연구회」를 발족하며 발족기념연주회도 가졌다.

강문득은 스승이 살아 계시던 1967년 제 1회 5.18민족음악상 기악부 대통령상을 수상, 스승의 은혜에 보답한다. 그때 (고)박정희대통령은 강문득에게 소원을 물었는데 딱히 유학도 필요없는 강씨는 다리를 고쳐달라고 했다. 대통령의 지시로 국립의료원에서 다리수술을 받은 그는 뼈가 붙지않아 2년 간 입원했다. 다행히 아픈 다리에 힘이 생겼고 연주생활에 몰입할 수 있었다. 1973년부터는 (부산)에서 제2의 삶이 시작됐다. 부산국악계에선 최초로 5선지악보를 사용했고 민요채보도 「최초」「최다」를 기록했다. 결혼도 했다. 20년 후배와 결혼. "국악이 번성한 서울보다는 국악불모지인 부산에 살면서 가야금의 뿌리를 내리고 싶었어요.” 38살에 부산대 국악과(83학번)에 입학한 그는 2학년 때 만난 같은 과 후배 정혜자씨 (29)와 결혼했다. 나이차이 20년. 아이를 낳을 생각은 없다. 제자들이 자식일 뿐이다. "청중에게 기쁨을 주려면 연주가는 그 몇 배의 슬픔을 겪어야 합니다." 청중을 배려하면서도 앙코르는 사절이다. 연주 때마다 너무 지쳐 뒷풀이의 여력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78년 국립국악원에서의 첫 독주회 이후 부산 문화회관 개관 기념공연, 가야금산조 여섯바탕 전독주 등 2백 여회의 무대에 섰고 91년 KBS국악대상을 수상하는 등 화려한 경력이지만 강씨가 추구하는 것은 오직 하나, 가야금산조 일곱 장단에 온힘을 쏟아 붓고 탈진한 채 무대를 떠나는 것이다. 푸르른 부산 바다의 무수한 모습을 가슴에 지닌 채. 

(부산= 유인화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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